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가 좋은 시냐 나쁜 시냐 하는 논쟁이 있다. 사실 아무도 나쁜 시라고 한 적 없다. 좋은 시가 아니라고 했는데, 좋은 시의 범위에 대해 서로 해석이 다른 게 아닌가 싶다. 한 측은 “좋은 시는 다 좋은 시지(좋거나 나쁘거나)”라고 생각하고 다른 측은 “좋은 시에도 등급이 있다(아주 좋거나 좀 좋거나 적당히 좋거나)”는 입장인 것 같다.
미국산 소고기에 등급을 매기듯이 시에도 등급을 매기자면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최상급으로 분류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첫째, 시대적 한계가 뚜렸하다. 이 논쟁의 시발점이 된 덧글에서 작성자가 시적으로 좋지 않다고 밝힌 이유다. 시의 대상을 민주주의라는 구체적인 대상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에게 주는 울림의 크기가 다르다.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 독재 시대에 민주주의를 갈구하던 마음과 지금의 추구는 그 절박함이 다를 수 밖에 없다.
둘째, 단어 선택에 따른 한계가 존재한다. 위 논쟁에 답글로 폴 엘뤼아르의 “자유”가 제시되어 있다. 표절 의혹을 제하더라도, 자유라는 단어와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주는 느낌이 다르다. 자유가 훨씬 폭 넓고 다양하게 해석되어질 수 있다. 민주주의라는 아주 특정한 단어를 선택함으로써 독자에게서 상상의 자유를 제한한다. 여백의 미가 부족하다.
셋째, 주제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인상의 강도가 약하다. 폴 에뤼아르의 “자유”는 주제를 숨긴 채 시를 진행하다가 맨 마지막에 단 한 번에 주제를 제시하고 마친다. 이로써 시의 처음부터 쌓아온 감정이 마지막에 이르러서 폭발하듯 터져나온다. 반면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주제를 미리 반복하여 제시하기 때문에 이런 효과는 얻을 수 없다.
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몇마디 덧붙이자. 김지하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좋은 시’다. 하지만 그 시대와 장소에 너무 밀접하게 연관된 나머지 보편성 획득에 실패했다. 따라서 최고의 명작이나 인류 고전의 반열에 오르기는 어렵다는 게 내 의견이다.